[유네스코 세계유산 - 한국의 서원] 안동 도산서원

테마 컨셉 안내

[유네스코 세계유산 - 한국의 서원] 안동 도산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lr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에 의해 문화유산, 자연유산 혹은 복합유산으로 등재된 유산 지역을 뜻한다.


한국의 서원은 2019'조선시대 교육 및 사회적 활동에서 널리 보편화되었던 성리학의 탁월한 증거이며,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 사이에 건립되어교육을 기초로 형성된 독특한 역사 전통과 성리학의 가치를 잘 나타낸다. 향촌 지식인들은 이 유산을 통해 성리학 교육을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한교육 체계와 건축을 창조였으며, 전국에 걸쳐 성리학이 전파되는데 기여하였다.' 는 의미에서 등재기준을 총족,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은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의 9개로 구성되었으며,이 서원들은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서원의 입지는 성현의 연고지, 자연과 하나되는 마음을 얻기 위한 자연 경관, 풍수 지리적인 부분까지 고려하여선정되었다. 서원의 공간은 크게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진입공간에는 대자연과의 일체가 되는 즐거움을 구하기 위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누정(樓亭):누각과 정자'가 있는 경우가 많다. 강학공간은 강학당, 기숙사, 장서각 등으로 구성되며, 제향 공간은 사당과 묘, 전사청으로 구성된다.


서원은1)제향 2)강학 3)장서의 3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하며, 향촌의 사회 윤리를 교육하며,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는 성리학 기반의지역공동체구심점 역할도 수행하였다.


[안동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陶山書院)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지으신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있던 자리에 이황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도산서원은 크게 퇴계 선생께서 생전 이용하셨던 '도산서당'이 있던 공간과 사후에 건립된 '도산서원'의 공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퇴계 선생이 건립한 건물은 도산서당과 역락서재(亦樂書齋), 농운정사(隴雲精舍) 등이며, 사후 건립된 서원 관련 건물은 전교당(堂), 상덕사(祠), 동재인 박약재(博約齋)와 서재인 홍의재(弘毅齋), 정문인 진도문(進道門) 등이다. 




[안동 도산서원 - 도산서당]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설계를 하고 지은 건물로 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이름 붙였다. 완락재의 뜻은 '완상하여 즐기니 평생을 지내도 즐겁다'는 뜻이고 공부를 하던 암서헌은 '바위에 기대어서 라도 공부에 조그마한 도움을 얻겠다' 는 뜻이다. 퇴계 선생은 도산서당의 앞에 연을 심은 못 정우당(淨友塘)과 우물인 몽천(蒙泉),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를 가꾸며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도산서당의 편액에는 새가 두 마리 그려져 있는데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곳이라는 해석과, 새처럼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자 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안동 도산서원 - 도산서당 편액]

 퇴계 선생이 직접 쓰신 것으로 '산(山)'자를 상형자로 구성하고 '서당(書堂)'에서 자유로운 글자체를 보인 것이 특징입니다.


[안동 도산서원 - 정우당]

  못에 연(蓮)꽃이 있어야 연못이 된다.


[안동 도산서원 - 절우사]


  도산서당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절우사로 명명한 매화나무, 난, 국화, 대나무가 심어진 작은 정원이 위치해 있다. 


 도산서원에는 진입공간에 별도의 정자나 누각은 없지만, 퇴계 선생께서 정자를 짓고자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만들지 못하고 자리를 만들어 두었다고 하셨던 곡구암(谷口巖) 인근에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와 천연대(天淵臺)라는 천연의 전망대를 가지고 있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봄바람에 꽃이 온 산에 가득하고, 가을 밤에는 달이 대(臺)에 가득하니, 사계절의 흥이 사람과 한가지다' 라고 노래하였다. 사계절의 흥이 사람과 한가지라고 노래한 구절은 65세의 퇴계 선생이 한글을 활용하여 노래를 지은 것은 예(禮)와 악(樂)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이끌어간다는 마음이 깔려 있다.

 도산십이곡의 주제는 자연과 학문에 대한 것이다. 학문은 우부(夫)도 알지만, 성인(人)도 모른다는 말로 범부(夫)도 익힐 수 있는 학문이지만, 성인도 다 알지 못할 만큼 학문의 세계는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퇴계 선생은 도산서당에 머무르며 느낀 마음을 표현한 시를 엮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남기기도 하였다.  도산서당의 편액에 그려진 2마리의 새를 보면서도 자연을 사랑한 마음과 그를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황이 별세하자 선조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1610년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과 함께 문묘에 모셔졌다.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안동 도산서원 - 천광운영대]



[안동 도산서원 - 시사단]




[안동 도산서원 - 도산십이곡] 



[안동 도산서원 - 농운정사 / 출처 : 문화재청]


  농운정사 역시 퇴계선생이 설계한 것으로 '공(工)'자 모양의 건축물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심학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라며 이러한 모양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농운정사의 창과 문의 높이는 서로 다르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채광을 조절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농운정사(隴雲精舍)의 농운(隴雲)은 언덕위의 구름이라는 뜻이지만,  도홍경(陶弘景)이 지은 시에서 '은자의 처소' 라는 뜻으로 쓰인 "언덕 위에 흰 구름이 많네. <隴上多白雲>"에서 따온 말이다. 은자의 처소라는 뜻은 청렴한 선비가 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현판은 퇴계 이황선생이 직접 쓰신 것이다.  용수사(龍壽寺) 승려였던 법련(法蓮)과 그의 제자 정일(淨一)을 임명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목공기술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사찰이었고, 어린 시절 용수사에서 퇴계 선생께서 공부하셨던 것 역시 영향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대칭적 건물로 2개의 공간으로 나뉘는데, 각각 2칸의 온돌방과 앞으로 돌출한 마루 1칸,뒤쪽에 봉당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일자형은 잠자는 방으로 지숙료(止宿寮)라 하고 앞쪽의 서쪽 방은 휴식의 공간인 관란헌(觀瀾軒), 동쪽은 공부방으로 시습재(時習齋)라 한다. 건물 앞 기단 월대(月臺)에는 전돌을 깔았다. 




[안동 도산서원 - 버드나무]


  도산서원의 앞에는 퇴계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실 때에도 있었다는 큰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원 앞에는 은행나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영주의 소수서원, 대구의 도동서원, 경주 옥산서원에도 큰 은행나무가 있다. 공자(孔子)는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가 유명하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杏壇)에 있었던 나무가 은행나무인지, 살구나무인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도 학자마다 주장이 달라 이수광과 정약용은 살구나무로, 이규경과 허목은 은행나무라 주장했다고 한다. 시대 별로 은행나무를 부르는 이름이 달랐었는데  진(晉)나라 때는 은행을 평중, 송나라 때에는 압각수라 불렀고, 은행이라는 명칭은 1054년 구양수의 시에서 처음 등장하였다고 하니 꽤 설득력 있다. 팽림 교수는 은행나무가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된 것은 당나라 때라고 한다.  한국전통문화대 이선 교수는 경향신문의 기사에서 '공자와 살구나무'라는 내용으로 위의 내용을 소개하며 '아마 은행나무가 크게 자라며 장수하고, 이름도 ‘은빛 살구(銀杏)’인 데다가 중국에서 왔으니, 행단을 은행나무 단으로 짐작했을 것이다.' 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 정문에서 바라본 진도문]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으로 되어 있는 누각의 형태로 지어진 경우가 많은데, 초기의 서원이라고 볼 수 있는 영주의 소수서원과 안동의 도산서원에서는 정문이 일문(一門)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서원의 진입로는 길게 하나의 축을 이루어 정문과 강학당, 사당이 일직선 상에 놓이게 되어 있으나 도산서원의 경우는 사당인 상덕사(尙德祠)가 그 축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산의 능선, 혹은 기운이 흐르는 축을 따라 지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안동 도산서원 - 전교당]


  도산서원의 전교당(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원장이 머물렀던 한존재(閑存齋)라는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산서원의 현판은 조선시대의 명필 한석봉이 쓴 것으로 당시 서원의 현판을 쓰는 것은 큰 영광이라 쓰는 것을 거절할 것을 염려한 선조가 부르는 대로 받아만 쓰라고 명했고 '원, 서, 산'까지 쓴 한석봉이 마지막의 '도()'자를 쓰면서 도산서원의 현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마지막자가 오른쪽 위로 살짝 올라간 듯 보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안동 도산서원 - 전교당에서 바라본 풍경]

둘러보기

연관 추천 관광지